1-1-4-03 기업 공개
대우실업은 명실상부한 민족기업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1973년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당시의 우리나라 기업은 경제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전 근대적 경영방식에 집착하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필요한 자금을 금융기관과 정부로부터
대우실업은 명실상부한 민족기업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1973년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당시의 우리나라 기업은 경제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전 근대적 경영방식에 집착하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필요한 자금을 금융기관과 정부로부터
창업 9년만에 쌓아올린 3억달러의 금자탑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13년 전 한국의 총 수출실적은 고작 1억달러였었다. 그런데 9년만에 대우실업이 그 세배에 달하는 3억달러의 수출탑을 쌓은 것이다.
대우실업은 창업 이후 매년 높은 수출신장을 거듭하여 1972년 11월 30일 제9회 수출의 날에 금탑산업훈장의 영예를 안았다. 영예를 안음과 동시에 대우실업은 재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대우실업의
대우는 1970년 7월부터 자체공장 12개 생산라인의 가동과 함께 엄청난 양의 제품을 생산하여 수출하였다. 제품은 주로 값싼 트리코트 셔츠가 주종이었다. 소재는 폴리에스터를 섞어 짠 것이 많았는데,
대우가 미국시장 조사를 끝내고 내린 결론은 기존의 트리코트 원단만 가지고는 미국시장으로의 진출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급 원단의 개발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과제였다. 그리하여 대우는
대우실업이 초기 수출의 주력시장으로 삼았던 동남아는 1968년 여름이 되자 새로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변화의 조짐은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정부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싱가포르는 한국 등지로부터
1972년 대우실업은 수출수요에 대응하고자 섬유공장의 확충을 도모했다. 그리하여 1972년 8월 4일, 남양산업사로부터 2개의 공장을 인수함으로써 기존의 3개 공장과 함께 모두 5개의 섬유공장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이
동남아의 트리코트 수출이 계속 급증하면서 대우실업의 사세(社勢)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68년 대우실업의 수출액은 291만 달러였다. 그러나 1969년에는 365만 달러를 기록해 명실공히 트리코트 수출왕으로서의 저력을 당당히
일감이 늘어나자 대우실업은 대도섬유공업사만으로 수출 물량을 대기가 벅찼다. 결국 수출을 하려면 공장이 있어야 했고, 그 공장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니 방법은 하청을 늘이는 것 뿐이었다. 그리하여
대우실업의 최초의 오더는 방콕의 시아 후아트(Sia Huat L.P.)사로부터 받은 2만 야드의 트리코트(L/C NO.44055) 지였다. 그 가격은 5,676달러였다. 대우실업은 이 오더를 뚝섬에 있는 동업자 명의의 대도섬유공업사에서
대우는 오늘날 큰집(大宇)이라고도 불리우고 혹은 대우주(Great Universe)라고도 불리우게 됐지만, 막상 작명은 단순명료하게 채택되었다. 그것은 동업자 도재환이 운영하던 대도직물의 ‘대’ 자와 김우중의 ‘우’ 자를 따 창업주
이런 국내외 상황 속에서 대우실업주식회사(大宇實業株式會社)의 창업이 준동(蠢動)되고 있었다. 창업주는 30세의 약관 김우중(金宇中)이었다. 창업주 김우중은 1959년 9월,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4학년 무렵부터 부흥부 자문기관이었던 경제개발위원회에서 아르바이트로
1967년에 들어오면서 정부는 수출신장이란 지상과제와 무역자유화라는 개방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획기적인 정책전환을 심도있게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출정책 입안, 각종 수출 지원제도 시행과 장단기 목표를 세우는 작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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