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이문근
대우의 기술 파트너였던 캐터필터사는 1980년대 들어 자국내 임금상승과 사업환경의 악화에 따라 종전까지 유지해오던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고 일본의 고마쭈사 등이 세계시장을 잠식해오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기업과의 공동사업을 구상하다가 81년 대우중공업에 이를 타진해왔다. 이때 신규사업을 통한 사세의 확장과 수출의 확대 등 적극경영을 추진중이던 대우중공업은 이 사업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이에 대한 참여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양사는 1983년 5월 지게차 대량 수출사업 계약을 체결하였다. 계약물량은 10년에 걸쳐 지게차 완제품 10만대를 대우중공업이 생산하여 캐터필러사에 수출하는 것이었고, 수출제품은 적재량이 2톤에서 3톤에 이르는 지게차로서, 엔진식과 전동식의 20개 기종이었다. 이 사업으로 대우중공업은 그동안 축적해온 풍부한 생산기술 능력에 캐터필러사의 우수한 제품기술력과 전세계적인 판매망을 상호보완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국제경쟁력을 갖춘 지게차를 생산,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사업은 당시 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간의 산업구조 재편성이라는 흐름을 재빨리 포착하여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으로서, 국제적인 기업과의 공동사업에 대한 시금석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국내 항공산업 분야는 부품 하청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항공기 제작의 근간이 되는 기체 생산은 전무한 상태로서 주로 공군 주도의 창정비와 KIT도입에 의한 전투기의 단순조립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에 비해 공업수준이 비슷하거나 뒤져 있는 대만,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의 국가들보다도 크게 낙후된 상태였다. 대우중공업은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선구자로서 1976년 창원에 공작기계사업본부를 설립한 이후 각종 공작기계의 국내외 공급 및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고, 이러한 바탕위에서 설계기술, 제조기술과 고급 기술인력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항공산업에 있어서도 부품 제작 및 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대우는 1980년대 접어들면서 이러한 자신감과 함께 국가정책에 부응한다는 시대적 소명감을 가지고 미래지향적인 고부가가치 제품 위주의 사업 전환을 모색하던 터였기에, 국내 항공기산업의 교두보를 앞장서서 구축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F-16 전투기의 한국 제작공급선인 미국의 제너럴 다이나믹스사는 한국기업중에서 F-16 전투기의 중요 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사업 수행능력을 갖춘 업체를 물색하게 되었는데, 면밀한 검토끝에 대우중공업을 적격업체로 결론지었다. 이와함께 상공부와 국방부 역시 나름대로의 검토끝에 대우중공업을 사업추진 적임자로 선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우중공업은 제너럴 다이나믹스사와의 본격 교섭에 나서 1984년 1월에 1차 공동사업에 대한 협상을 완료하고 그해 5월 항공사업본부를 신설하였다. 그리하여 1984년 4월에 대우중공업과 미국의 제너럴 다이나믹스사는 F-16 전투기 기체부품 공급계약을 정식으로 체결하였다. 계약물량은 F-16 전투기의 중간동체 100대분, 전방동체 150대분, 비행안정판 300대분으로서 이들은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납품토록 되어 있었다. 항공기 사업은 수출사업으로서 전망이 밝고 외화가득율이 매우 높을 뿐 아니라 기계, 전자 기술 등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고도의 기술능력이 요구되는 분야로서 전 산업에 걸쳐 기술파급효과가 일어나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한국으로서는 이에 대한 참여와 기술개발이 서둘러 요구되는 업종이었다. 대우중공업이 F-16전투기의 기체생산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생산기술수준에 대한 국제적인 신인도를 한층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또한 회사의 성격을 일반기계 생산에서 고도 정밀기계의 생산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항공기 기체 생산사업은 최종 생산제품이 나오기까지 사업시작 단계부터 48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것이 국제적인 통례였으나, 대우중공업은 24개월도 채 걸리지않은 기간에 제품을 생산해내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F-16 기체부품의 초도품 납품 이후 GD사에 지속적으로 수출된 제품을 통하여 대우중공업은 그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GD사가 미국 현지에서 수출된 제품의 품질을 비교해본 결과 알려진 사실로서, GD사의 10여개 해외 공동 생산업체에서 공급하는 제품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하여 1986년 8월 GD사로부터 품질 최우수회사 기념패를 수상함으로써 기체 생산의 기술수준을 국제적으로 입증받게 되었다. 1985년 12월 미국의 노드롭(Northrop)사와 수출계약을 체결한 이후로 미국의 보잉(Boeing), 영국의 웨스트랜드(Westland), 프랑스의 히스파뇨 슈이자(Hispano Suiza) 등과 계속해서 계약을 체결하고 수출을 확대시켜 나아갔다. 특히 노드롭사와의 수출계약 체결은 당시 세계 민항기시장에 전혀 이름이 나지않았던 대우중공업이 처음으로 해외시장을 공략하여, 세계 유수의 항공회사로부터 직접 수주를 하였다는데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또한 물량의 증대를 통한 경쟁력 확보와 신규사업 유치를 위하여 기술과 인력, 시설투자 등을 다각도로 검토하였으며, 이에 따라 1986년 2월에는 항공기 기체생산공장을 확장하였다. 이당시 정부의 8대 군항공기사업을 위하여 전 항공업계가 모두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대우중공업은 중형 헬기분야에서 미국 UTC그룹의 시코스키(Sikorsky) 항공사와 합작투자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대우중공업이 중형헬기사업의 주계약자로 지정받기 위한 전략으로, 1986년 10월 15일에는 합작회사인 대우-시코스키항공(주)를 설립하였고, 12월 9일에는 시코스키와의 기술도입계약도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창원공장에 사무실과 격납고, 헬기 주기장, 관제시설 등 중형 헬기 생산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이후 사업 자체가 무산되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어서 대우중공업은 세계 최대의 항공회사인 보잉(Boeing)사와 접촉하여 B747 Inspar Wing Rib 500대분 수출 계약을 1987년 1월에 체결하였다. 이 제품은 원래 미국의 항공회사에서 독점 생산하고 있던 것으로 대우중공업은 가격경쟁력과 품질을 인정받아 이를 수주, 생산하게 되었다. 이 사업을 통하여 대우중공업은 보잉사로부터 사업운영, 체계, 관리 등 항공사업에 관련된 각종 경영기법을 배울 수 있었으며, 현재까지 보잉사의 가장 모범적인 해외 부품공급자로 평가받고 있다. 1988년 1월에는 항공사업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우주항공연구소의 발족이 있었다. 이 연구소의 설립으로 많은 우수인력, 특히 국내외의 석․박사 등 고급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기본훈련기 사업(KTX-1)의 태동과 더불어 여러가지 개발프로그램을 수행함으로써 연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89년 7월에는 독일의 도니어(Dornier)사와 32인승 경비행기(DO-328) 국제공동개발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사업은 대우중공업이 처음으로 국제 공동개발에 참여한 것으로 대우중공업이 제작한 12개의 비행기 동체 쉘(Shell)이 이탈리아의 에어마찌(Aermacchi)사에서 하나의 동체로 결합되고 최종적으로 독일의 도니어사가 조립 완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많은 설계변경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이후 모든 공정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비행기 개발사업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던 좋은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90년 7월 대우중공업은 정부의 군용항공기 사업인 기본훈련기사업(KTX-1)과 경전투 헬기사업 (KLH)의 주계약자로 지정됨으로써 항공사업이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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