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3 대우조선공업㈜ 합병
대우중공업은 1994년 10월 1일 그룹 계열사인 대우조선공업(주)를 흡수, 합병하였다. 이것은 1989년 8월 산업정책심의회의 결정에 의한 정부의 조선산업 합리화계획에 따른 것이다. 이당시 합리화 계획의 골자는 조선
대우중공업은 1994년 10월 1일 그룹 계열사인 대우조선공업(주)를 흡수, 합병하였다. 이것은 1989년 8월 산업정책심의회의 결정에 의한 정부의 조선산업 합리화계획에 따른 것이다. 이당시 합리화 계획의 골자는 조선
1980년대 중순부터 1990년까지 대우중공업이 그동안 추진해온 사업확장과 전략사업은 사업부제 실시 이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영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내실 위주의 경영활동을 펼친 결과,
대우중공업은 1977년 일본 히다찌(Hitachi)사와의 기술제휴로 굴삭기를 생산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자립 방안을 꾸준히 모색해 왔다.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 중장비업계는 기술개발 환경의 열악함과 경험부족으로 인하여 자립모델의 생산은
대우중공업은 1973년 방위산업체로 지정된 이래 군용 차량에 탑재되는 디젤엔진, 지게차 등 일반제품외에도 각종 방산품을 생산 납품해 오면서 그 물량을 점차 늘려왔다. 1980~1984년에 이르는 기간은 방위산업분야에서도
대우의 기술 파트너였던 캐터필터사는 1980년대 들어 자국내 임금상승과 사업환경의 악화에 따라 종전까지 유지해오던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고 일본의 고마쭈사 등이 세계시장을 잠식해오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기업과의
1979년말에 일어난 제2차 오일 쇼크의 여파로 국제경기는 깊은 불황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외의존도가 큰 국내경기는 국제원자재가의 급등, 고금리, 국제 수요 감소, 보호무역주의의 강화 등에
대우의 한국기계공업(주) 인수 후 경영진과 전 종업원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인수 원년인 1976년에 전년대비 100 % 이상의 매출신장을 기록하면서 만성적자 기업의 불명예를 벗고 흑자기업으로 전환되었다. 비록
대우중공업은 한국 기계공업의 선두주자답게 ‘공작기계공업의 발전이 곧 국가공업 발전의 기반’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1976년부터 공작기계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국내 기계공업의 가장 핵심적이고 중추적인 분야인 공작기계 산업의
1976년말 산업기계공장의 시설을 재정비하여 지게차 전용 생산라인을 구축한데 이어, 당시 중동지역 건설붐과 국내 건설사업의 활기에 힘입어 1977년 2월 일본의 히다찌(Hitachi)사와 굴삭기 및 유압 크레인 생산을
인수 초기 내부관리체제 혁신을 위하여 단행한 일련의 관리체제 정비작업 및 종업원 의식개혁 작업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가자 대우는 경영정상화 계획의 본격적인 실천작업에 착수하였다. 종래의 소량 주문생산
대우인들은 만년적자의 한국기계를 인수후 1년만에 정상화 하여 흑자기업으로 반전시켰다. 대우는 한국기계의 인수당시 120억원의 자본금을 250억원으로증자, 자본의 충실을 기하였다. 매년 10억원씩 증자해야 한다는 인수 조건이 있었지만
한국기계의 역사는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 6월, 『조선기계제작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기계공업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공장이었다. 1939년 일제에 의해 군수공장으로 전환된 후
1971년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지원을 위해 전담기구인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을 설치하고 1973년에는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의 내용을 보면 중화학공업 비율을 1971년 35.2%에서 1981년에는 51%로 고도화하고 수출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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