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모세가 팔을 바다로 펼치자 여호와께서는 밤새도록 거센바람을 일으켜 바닷 물을 뒤로 밀어붙여 바다를 말리셨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14장의 한구절이다. 홍해는 옛부터 모세의 기적을 상징 하던 바다였다. 이 기적의 바다인 홍해를 끼고 수단의 최대 항구도시 포트수단에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었다고 수단인들은 지금도 말하고 있다. 기적이 일어난 때는 1980년 5월 29일이었다. 당시 수단 최대의 공장이며 중화학공장 최초인 수단타이어공장이 바로 수단인들이 말하는 기적의 산물이다. 고온 건조한 아프리카 모래벌판, 홍해변에 세워진 거대한 공장을 수단인들은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기적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1미터짜리 동상 하나를 만드는 데도 1년 남짓이 걸려야 하는 수단인들의 의식구조에 비추어본다면, 1년 5개월만에 세워진 타이어공장은 분명 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단인들은 타이어공장의 준공을 ‘인슐라’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수도 카튬과 포트수단의 비행장에는 대우 ITMD (International Tyre Manufacturing & Distribution)의 현수막과 아취의 물결과 연도에 늘어선 수많은 인파들이 이를 입증했다. 그들은 ‘꼬레(코리아)’ ‘꼬레’를 외치며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것이다. 1979년 1월 24일, 첫삽을 뜬 수단타이어공장은 오로지 대우의 힘으로 일궈낸 값진 열매였다. 의미 또한 컸다. 우리나라 건국 사상 해외 최초의 플랜트 수출이란 점과, 공장의 설계에서 생산에까지 모든 공정을 우리의 손으로 끝맺었다는 점이다. 수단 정부당국과 경제협력을 체결하고 전진기지 역할을 한 대우실업의 카튬지사, 기초설계를 맡은 대우엔지니어링, 기계설비를 제작한 대우중공업, 보일러 설비를 맡은 대우바브콕, 건설을 맡은 대우개발, 자재 및 기타 제반 뒷처리를 담당했던 대우실업, 적기에 물자를 공급한 해우선박 등 대우가족들은 첫 해외프랜트 수출에 신명이 나 혼신을 노력을 쏟아부었다. 1996년 현재 자본금 1천4백만달러로 대우가 50 %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간 매출 규모는 1994년 1천20만달러, 1995년 1천6백80만달러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대지 3만1천평, 건평 1만3천평의 이공장은 한국인 9명을 비롯 현지인 7백30명이 근무하고 있는 수단내 손꼽히는 제조업공장이다. 현재 생산능력 7천3백톤으로 연간 40여만개, 33종의 타이어를 만들고 있는데 70 %는 내수에 충당하고 나머지는 수출을 하고 있다. 수단타이어공장의 특색은 외부의 조건에 관계없이 가동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항공모함 같은 시스템으로 운영된다는 뜻이다. 공장이 가동될 수 있는 기본적인 것, 수단의 열악한 전력 사정을 감안하여 6천 5백KW의 전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 발전설비와 식수 및 공업용수를 바닷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한 담수처리설비가 그것이다. 이 공장이 가동되는 날, 수단의 누메이리 대통령은 대우의 창업주 김우중 사장(당시)에게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오더 오보투나일’ 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준공식날을 한국의 날로 정하여 국경일로 선포하였다. 그후 파트너와의 경영계약에 의해 대우는 ITMD의 운영을 책임지고 수단의 경제에 일조하기 위해, 오늘까지 대우 기술진을 상주시켜 공존공영의 의리를 지키고 있다. 대우가 수단에서 땀흘리고 있을 즈음 국내는 참으로 많은 시련이 있었다. 제2차 석유파동이 본격화 되고 10.26사태로 인한 사회적 혼란 등 경제외적 어려움이 더했고, 1980년 미증유의 농작물흉작까지 겹쳐 국내경제는 1980년 벽두부터 마이너스 성장, 물가상승, 국제수지악화라는 삼중고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어려운 때 대우가 바다건너에서 땀을 흘려줌으로써 조국의 번영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자 했음은 물론이다. 수단에는 그밖에도 대우의 공장들이 많다. 수도 카툼시내에서 자동차를 타고 북동쪽으로 15분가량 가면 산업공단내 (주)대우 수단법인의 주력기업인 방직공장 ‘NCTC'(Nile Corporation Textile Corporation)이 자리잡고 있다. 공단내 상당수 공장이 전력 부족 등의 이유로 문을 닫아 수단의 경제사정이 최악의 상태라 대우공장을 제외하곤 공장이라기보다 창고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공단내 차량이나 인적의 이동도 드문드문하다. 그러나, NCTC공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잘 정돈된 2층건물과 함께 2만여평가량의 푸른잔디가 펼쳐져 있어 외부의 혼잡하고 지저분한 거리와는 대조적이다. NCTC는 6만9백12추의 방적설비와 3백48대의 직기를 갖춘 대형 방직공장으로 연간 5천7백톤의 원사와 1천2백만야드의 원단, 5백50톤의 타월을 생산하고 있다. 공장부지 13만평에 2개의 방직공장과 1개의 제직공장, 타월공장등 4개의 생산공장과 원료를 공급하기 위한 대규모 원면세정장 시설을 갖추고 있다. 완제품은 대부분 외국에 수출하고 있는데 대우가 포트수단에 설립한 또 하나의 방직공장 NIC(Nile International Corporation)와 더불어 수단내에서는 중요한 수출기업이다. 중국인 1백여명과 수단인 2천5백여명등 다국적 부대를 이끌고 경영정상화를 앞당기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는 대우인은 모두 20여 명이다. 이 공장은 40여년의 역사를 가진 수단 최대의 면방직공장이었으나 1988년이래 조업이 중단되었다. 그 공장을 대우가 1992년에 인수해 1년동안 개보수공사를 거친 끝에 1993년 11월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대우는 이 회사를 인수한 이후 조경과 건물 개보수에 과감한 투자를 해 작업환경이 수단내 최고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이 공장은 대우특유의 기업정신으로 경영 1차년도인 1994년 70 %이상의 가동률을 올림으로써 수단정부와 경제계에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공장설립 불과 3년만에 수단경제의 구심점으로 부각한 것이다. 또다른 방직공장인 NIC는 포트수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1970년대 후반 동독이 건설한 방직공장이다. 그러나 전력난으로 20여년간 가동하지 못하던 것을 대우가 1993년 9월 3천만달러에 인수, 1년동안 걸친 개보수공사와 자가발전소 건설공사를 거쳐 95년 3월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생산능력은 정방 6만1천추이고 연간 7천톤의 원사를 생산하며 80~90 %는 유럽으로 수출하고 있다. 직원수는 한국인 9명과 중국인 85명 등 모두 1천9백여명이다. 대우는 또 수단에 피혁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카툼에서 2백Km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GTC(Gezira Tannery Corporation)가 그곳이다. 이 곳은 양가죽과 소가죽을 가공 처리해 중간재 형태로 판매하는 수단내 5개 무두질 공장의 하나다. 이 공장을 대우는 1994년 5월 수단정부와의 합작투자방식으로 인수하여 개보수공사를 마치고 정상가동하고 있다. GTC는 현재 수단내 대우공장 중에서 가장 알찬 실적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루에 양피 2천5백매, 우피 5백매를 처리하는 규모를 갖춘 이 공장은, 한국인 3명과 현지인 2백여명이 제작을 맡고 있다. 항상 일정수준의 품질 분류기준을 지켜 유럽바이어들로부터 수단내 최고품질의 공급업체로 인정받고 있다. 그밖에 의약회사 GMC(General Medicine Corporation)가 있다. GMC는 우리나라의 신풍제약및 현지인과 합작투자하여 1994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현재 나일강에 번식하고 있는 디스토마 일종의 기생충을 박멸하는 구충제와 항생제를 생산함으로써 수단의 보건에 기여하고 있다. 또 건설회사인 NCCC(Nile Corporation Construction Corporation)와 리비아등지에서 쓰이던 중장비를 옮겨온 중장비 리스회사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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