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맹한 무굴제국의 용사들이 중앙아시아를 향하여 웅지를 펼쳤던 역사의 땅 펀자브 대평원. 달려도 달려도 끝없는 지평선만이 펼쳐지는 이곳에서 파키스탄의 새로운 역사가 열리고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몇 년째 대우인의 손으로 5백년의 역사와 공간을 잇는 대역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15세기 무굴제국의 수도 라호르에서 20세기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로 힘차게 뻗어가고 있는 6차선 고속도로가 바로 대역사의 현장이다. 이 곳에 가보면 중앙아시아를 정복해 대국을 꿈꾸었던 무굴인들의 용맹성이, 경제대국 파키스탄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로 다시 한 번 피어 오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라는 의미에서 「모터웨이」로 이름 붙여진 이 고속도로는 1992년 4월 첫 삽질이 시작돼 1996년말 현재 전체 공정의 80%를 넘기며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1997년말이면 전공정이 마무리되고 산업 도시 라호르에서 생산된 각종 공산품이 이슬라마바드를 향해 달려가게 될 것이다.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와 제1의 산업도시 라호르를 잇는 「모터웨이」공사는 파키스탄의 정치적 중심지인 이슬라마바드와 산업요충지인 라호르를 잇는 대역사이다. 파키스탄 국내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과 키르키스탄, 카자흐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와 아라비아해로 연결되는 길목에 파키스탄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아라비아해의 항구도시 카라치에서 산업도시 라호르, 이슬라마바드를 지나 페사와르, 우즈베키스탄에 이르는 거대한 산업도로망을 이어 놓으면 낙후된 이 지역 경제가 살아날 수 있으리란 것은 지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런 야심찬 계획의 첫 번째 시도가 바로 중부 산업도시 라호르에서 펀자브 대평원을 가로질러 이슬라마바드에 이르는 모터웨이인 셈이다. 모터웨이의 중요성은 공사금액이 파키스탄 실질 예산의 4분의 1이 넘는 11억6천만달러에 달하고 이 공사가 현지정부의 정치행정으로 부각된 것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파키스탄은 정부주도하에 사회주의 체제에서 탈피해 시장경제로 전환,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고속도로는 파키스탄의 경제부흥에 기여하게 되는 것은 물론 한국과 파키스탄간의 협력강화에도 크게 기여하였고, 또 할 것이다.
이 도로건설은 그 자체로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계 건설역사상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 이은 최대 규모, 단일 도로건설 규모 세계 1위, 파키스탄 최초의 고속도로, 국내 최초의 턴키 베이스 도로건설 수주 등….
이 때문에 이 고속도로는 입찰에서부터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지난 1991년 8월 대우는 이탈리아의 아스탈디사, 영국의 칼레코사 등 5개 건설회사와 2차에 걸친 입찰 끝에 공사금액 9억6천만달러에 3백40km의 4차선 도로공사를 수주했다.
그리고 1996년 2월에는 전체구간을 4차선에서 6차선으로 확장하고 시발점과 종점에 각각 17km의 추가도로를 건설하는 2억달러 규모의 건설계약을 추가로 체결했다. 대우가 수주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해외건설에서 높은 기술력, 풍부한 국제건설 경험을 인정받은 때문이었다.
공사금액이 말해주듯 이 공사는 1개 회사가 수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규모다. 전체 공사구간은 평야와 구릉, 산악지대가 산재해 토공물량이 4천6백만㎥로 덤프트럭 4백70만대 분량에 달하고 기층물량은 3백60만㎥에 이른다. 도로포장에는 2백12만 톤의 아스팔트 콘크리트가 소요됐고 2천5백12대의 각종 차량과 중장비가 동원됐다.
이 때문에 이 공사는 처음부터 어려움 투성이었다. 처음 이 공사구간을 조사하러 왔을 때는 과연 도로를 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고, 조사에 참가했던 대우인들은 지금도 말한다.
전체를 4공구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는 이 고속도로는 구간 모두가 난코스다. 라호르 기점 1, 2공구(1백80km)는 지대가 낮아 이 지역을 흐르는 강들이 해마다 범람하고 평야 곳곳에 거미줄처럼 얽힌 관개수로들은 공사의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침수를 피하기 위해서 1백80km 전구간에 걸쳐 높이 2.5미터 이상 지반을 다지고, 관개수로마다 교량을 건설했다.
3구간은 해발 7백m의 산악지역이어서 거대한 암염광산으로 이루어져 솔트레인지(Salt Range)로 불리는 이 공구는, 지진이 심심찮게 발생해 공사조건은 최악이었다. 그러나 수주와 난공사보다도 어려운 것은 5년이라는 짧은 공기에 공사를 마무리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부실공사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이 지역 진출을 계속하려면 손해를 보더라도 공사는 더 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우는 공기를 맞추기 위해서는 철저한 현지화가 아니면 안된다는 판단하에 처음부터 인력에서 자재의 조달, 하청업체의 선정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현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대형공사의 경험이 없는 파키스탄에서 기능인력을 구하기란 하늘에서 별따기나 다름 없었다.
또 아스팔트와 기름, 철근, 시멘트 등의 조달을 위해 선수금까지 주고 주문을 해놓아도 시장경제의 경험이 없는 현지 외주업체들이 누가 돈을 더 주면 주문했던 자재를 팔아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1996년도 들어와서는 초기와 많이 달라졌다. 구하기 어려웠던 인력은 한 때 7천여명에 달할 정도로 수급이 원활하며, 이중 95.6%는 파키스탄 현지인력으로 조달됐고, 한국인력은 관리자를 포함해 80여명으로 공사를 수행 중이다.
어렵게 선발되어 국내 고속도로 현장에 연수까지 보내면서 교육한 기능공들은 한국인 기능공의 80% 수준에 달할 만큼 조련됐고 파키스탄의 외주업체와 자재공급선까지 갖추게 되었다.
대우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대우와 한국의 이미지를 새롭게 심고 있다. 높은 급여와 샤워시설까지 딸린 기숙시설을 갖춘 대우건설 현장 근로자들은 현지인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고 월급날이 되면 이 지역 경제가 호황을 보일 만큼 지역사회 경제에도 커다란 몫을 담당하고 있다.
